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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교수, 육영수 여사로 시작해서 샤론 스톤, 김주하의 이야기를 통해 짚어보는 자조와 실학, 그리고 자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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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장육
댓글 0건 조회 728회 작성일 23-08-0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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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강원지회 김장육입니다.

 

지난 번 저의 토론방 글에서 나무대통령-나무박사-나무의사의 역학관계를 언급해 드렸는데 부연설명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님의 평가 역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좀 더 권위 있는 분들의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3대 자유경제원 원장이자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이신 김정호 교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이해해보면서 자조의 정신과 진짜 실학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우선 거두절미하고 김정호 교수님의 구어체 문구를 다듬어 아래와 같이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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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을 여기까지 이끌어왔던 혁신산업들이 전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소위 중화학 투자박정희의 중화학 투자의 결과물들입니다. 6대 산업들이 다 그때 본격적으로 성장을 했던 겁니다중화학 투자를 정부가 하는 것이 옳았느냐틀렸느냐에 관해서는 뭐 왈가왈부할 수는 있어요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렇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약 120여개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독립을 했습니다그중에 좀 큰 나라들 예를 들어 브라질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인도파키스탄알제리 등등 소위 3세계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 모두 중화학 투자를 했습니다그러니까 야망을 갖고 있는 나라치고 중화학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은 넌센스입니다다 제대로 된 산업을 갖고 싶은 거죠그래서 자동차공장도 만들고조선소도 만들고철강도 하고 그랬습니다그런데 그 중에 성공한 나라가 어느 나라냐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나머지 나라들은 다 어떻게 됐냐다 자동차가 있긴 합니다파키스탄인도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라질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다 자동차가 있습니다한국처럼 투자를 했다는 거죠그러나 전부 내수입니다수출하는 나라가 없습니다딴 나라에 내놓아도 팔리지가 않습니다오직 한국만 수출을 하게 된 겁니다그러면 뭐가 달랐느냐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투자를 장사꾼들에게 시킨 겁니다. 1960년대 70년대 초반까지 테스트를 했어요기업에게 수출해보라는 과업을 주고 이들을 눈여겨 본 것입니다그리고 중화학 공업을 그들에게 맡긴 겁니다만들면 뭐합니까팔수 있어야 하잖아요그러나 다른 모든 나라들은 공무원에게 일을 맡겼습니다장사꾼들에게 일을 맡기면 다 떼먹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까 일을 맡기지 못하는 거죠그래서 그들은 (중화학 분야의 투자를공무원에게 애국심을 갖고 일을 진행하도록 했습니다혹은 교수들이 경제학 지식을 갖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퇴역군인들이 애국심을 갖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다 그렇게 한 거예요어떻게 됐느냐다 망했습니다공무원들이 장사를 어떻게 해요공무원들이나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합니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그러나 장사꾼들은 안 되는 게 어딨어?’라는 생각을 합니다정주영 회장의 경우 맨날 하셨던 말씀이, ‘너 해봤어그거먼저 해 보라고.’였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정신은결국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겁니다다른 나라들은 공무원들에게 일을 맡겨 놓으니까 안 되죠당연히선진국들이 이미 철강공장 만들어놨지자동차공장 만들어놨지다 있는데 이제 설비를 만들어서 어떻게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물론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처럼 일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장사꾼들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주면 되는 거예요기본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기업이 망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거예요.” /김정호 교수, 3대 자유경제원 원장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소개글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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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김정호 교수님의 말씀도 단편적인 해석이며 단편적인 설명을 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대표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확대진흥회의(혹은 무역확대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직접 보고받고 즉시 그 문제에 대하여 해당 장관이나 기업가로부터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답변을 받아내셨습니다다시 말해서 오로지 기업인들에게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중동 건설 수주 붐이 일었을 때는 건설인들의 숙박비 문제 등의 시시콜콜하고도 세세한 문제까지 직접 그 문제를 찾아내 보고를 받고 즉각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인들의 숙박비용이 비싸진다는 것은 건설인들의 이윤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며 건설인들의 이윤이 줄어든다는 것은 한국으로 유입되는 국부가 줄어든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해외진출 기업의 입장과 이윤을 직접적으로 행정부가 고려하는 실학적 가치가 반영되는 우수한 행정시스템을 직접 고안하고 주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만에서는 2년 정도 걸려서 해결될 일이 한국에서는 한 달 안에 해결되었을 정도입니다.

당연히 김정호 교수님이 이런 걸 모르실 리는 없습니다다만 어떤 설명을 하기 위해서 그 핵심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구조를 깔끔하게 다듬어서 전달을 하려다보니 단편적인 부분을 부각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시대를 살며 백업에 충실했던 수많은 Super 테크노크라트예를 들면 백영훈 박사박태준 회장김정렴 비서실장남덕우 부총리, 김학렬차관최규하 총리오원철 장관김현옥 장관훗날 고건 총리 등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분들이 아니김원장그럼 우리는 뭐가 돼?’하면서 따질 수도 있는 정말 배꼽 잡는 설명방식이지만 김정호 교수의 설명에는 당신 스스로도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까지 분명한 핵심을 전달하고자하는 의미를 담았다는 것입니다.

 

이 배꼽 잡는 설명은 동시에 매우 날카로운 분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조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져 있고둘째로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경제학적 자유의 가치가 담겨져 있으며셋째로 실질과 본질을 추종한 실학의 정신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번째의 이유로 인하여 최진덕 박사는 실학을 진짜 완성한 사람을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남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공무원들에게 일을 맡겼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위험을 감수하고 기업인들을 신뢰하고 기업인들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입니다박정희 대통령도 무작정 기업인들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지표를 얻기 위하여 테스트를 거쳤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성과는 61년부터 시작되어 72년에서 73년 근처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믿어야 한다느니 사람이 먼저라느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철저지 배제되는 것입니다나무가 자라는데 토양이 바람직하게 조성되면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이지아무리 나무가 잘 자라려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고 해서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이 아니듯이기업 역시 그 기업의 환경이나 능력과 실적을 보면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실질적인 실력과 경험그리고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실학적인 식견이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만 성공한 것이라는 것이 김정호교수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가로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모든 진단에는 발생시점이 언제였는가를 보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수목진단도 마찬가지이며 국가의 진단에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무가 자라듯이 국가의 발전이나 기업의 발전과정도 기술적으로 나무(Tree)에 비유하는데 이는 국가의 생리와 나무의 생리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테크 트리라고 말하며이 테크 트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나무의사 선생님들만큼 완벽히 일치하는 학문을 접한 사람들도 드물기 때문에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1973년 이후라는 시점은 유신 이후를 말하는 시점입니다. 60년대 말까지 기업을 테스트해놓고 끝마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더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이 되었을 텐데 훌륭하게 과업을 완수해 내었다는 것이며 이는 유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모든 과업이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유신헌법은 1972년 10월 17일에 선언하여 공포되었습니다. 

 물론헌정의 중단 사태는 명백하고도 심각한 헌법상의 위반이지만 헌법 자체 역시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을 위한 그 실질적인 가치를 본다면 유신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욕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후대들에게 어느 정도 욕을 먹을 것이라는 것도 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는 욕을 먹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이미 군 내부에서 엄청난 수준으로 빈번하게 발생했던 모든 모함들을 모두 털어내면서 성과를 낸 분이라 한 단계 더 위의 국가 차원에서도 주저함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실력 있는 작전지휘관에게 실권을 주고 그 작전을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부대를 배치하듯이 능력 있는 기업인들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국가의 행정체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하느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성립되는데결국 국민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국민에게 좋게 됐느냐나쁘게 됐느냐를 본다면 10억불 수출시대를 넘기면서부터는 대한민국은 기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명백히 국민에게 좋게 됐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내포적 공업화를 외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안 좋게 됐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내포적 공업화란 수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수출을 하게 되면 자본적으로 선진국에게 종속되고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만다는 이론을 수용한 결과입니다그리고 이 종속이론은 레닌과 스탈린에 의하여 강화됩니다.

즉 소련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이론에 불과했던 것으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습니다유럽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기준이나 규격을 맞춰서 생산을 해내야 하고 판매를 해야 합니다하지만 이를 종속되는 것이라고 규정하거나 나아가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데에는 아무런 근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종속이 된다고 해도 굶어 죽지 않는 것이 당장 중요하며 수출을 통해 부를 누리는 것이 훨씬 더 큰 행복과 삶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출을 하지 말고 농업을 통해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는 발상은 이조시대의 문제점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조시대의 문제점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저서까지 발간한 연구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구자의 깊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후대의 연구자들의 식견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우리보다 열 배백 배천 배 이상을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이며 더 많은 정보로 정교한 분석을 해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농업에만 의지하는 농업국가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힘 센 나라들에게 종속될 뿐이었습니다그리고 농업에만 의지하는 국가는 항상 기아에 허덕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농업생산물이 일부의 지배층에게 독점되기 때문입니다이 독점 현상을 막는 것은 선진적인 경제체재이지결코 생산량을 늘린다고 해서 자원의 재분배가 원활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인간들의 본능적인 이기심이 항상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땀은 남들이 흘리고 이득은 내가 독점하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좋다나쁘다라고 규정하려는 시도 역시 오류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는 것입니다다만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인데바로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검증된 실력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기에는 조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이를 겸허한 자세로 흡수하고 배우는 속도가 워낙 빠른 분이다보니 거의 통달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그래서 실학을 완성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게 되는 연유라고 보며 딱히 반박할 만한 근거 역시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경공업 시대에서 10억불중공업 시대로 전환하여 100억불 수출 시대를 살던 당시의 농업인들의 평균 소득은 오히려 도시민들의 평균 소득보다 1.2배 이상 높았는데 이는 누가 진정으로 깊이 있는 연구자의 자세로 국민을 위했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일반 국민들을 지배하거나 착취를 더욱 용이하게 하고자 할 때는 어느 나라나 우민화 정책을 씁니다이조시대가 대표적으로 그랬고그런 이조시대 역시 사농공상의 우선순위를 두며 농업을 장려하였습니다.

농업에 기반을 두면 노동력을 확보해야 하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이들이 노비 혹은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당연히 교육의 기회는 박탈의 대상이지절대 장려의 대상으로 성립될 수 없으며 대학이나 학교가 늘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수출을 지향하게 되면 공업국가를 완성해야 하고 공업을 하려면 많은 과학기술을 배워야 함에 따라서 대학을 짓고 교육을 강화하며 기술인력이나 전문가를 배출하게 되고 이들은 자유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기 마련입니다미국의 경우도 남북전쟁을 통해서 각각 다른 정체성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까지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과거 구 소련은 미국과 체재경쟁을 하면서 어떤 국가의 체재가 더 우월한지를 놓고 일종의 사회적 실험에 진지하게 임한 연방체재 국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 구 소련이 스스로 붕괴한 이유도 소련의 세계적인 학자나 전문가들이 88올림픽 당시 서울을 방문했을 때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반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고 일반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철천지 원수로서 성립이 됩니다자신들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어버린 위대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이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들을 거의 모두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연구에도 나름 진지한 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고해도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따라 할 수 없는 성질이 존재합니다다른 지도자들도 열심히 강한 나라를 만들어 보려고 했고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 주장을 공고히 할 것입니다. 

 대부분은 박정희 정신의 철학이나 사상의 단계를 이해해야하는 과정에 진입할 때 애를 먹는 것으로 여겨집니다왜냐하면 이렇게 청렴하면서 깨끗한 지도자는 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대로 분석이 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그 분 뒤에는 기본적으로 바가지를 절대 긁지 않는 육영수 여사님이 계셨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둘째로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자세즉 박정희 대통령이 나무를 심기 위해서 얼마나 진지했으며 열과 성의를 다했는지를 간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속성은 산림인들의 DNA 속에는 너무나 확연하고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우리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공의 덩사오핑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이 부분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서 곧 잘 흉내를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시장개방을 통한 적극적인 경제화 정책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연구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면 어떻고 검은 고양이면 어떤가?’라는 말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모든 평가를 맡기고 일에 집중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이 아이러니하게도 덩사오핑의 입으로 전해져 명언으로 남겨졌다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체재경쟁에 있어서 누구보다 진지했고 반공을 국시로 삼았지만 의미 없는 좌우의 이념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했고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시간낭비라고 보았습니다오로지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해내고 산업을 부흥시키고 산을 푸르게 녹화시키며 자연과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자녀를 입양 보내서 먹고 살아가야 하는 가정을 살아생전에 결코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시해를 당하셔서 80년대 중 후반까지 이어진 한국인 아이들 외국 입양보내기의 결말을 직접 끝맺지는 못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포적 공업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민주화라는 가치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 혹은 비판했는데 그러한 추세는 90년대에는 극에 달해서 현재의 시점의 40, 50대들은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왔고 여전히 이러한 추세는 2023년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주의로 결론 내려지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어떤 속내가 있는지는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사회주의적 발상은 고대에도 있어왔고 근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정리되고 주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엥겔스는 사회주의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고 마르크스는 정신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자녀를 입양을 보내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살던 시대에서 오히려 역으로 약자를 위한다는 명분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민주화라는 가치가 얼마나 허울뿐인지를 후대의 역사가들이 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거나 이를 보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마르크스가 앓았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질병이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닙니다부끄러움의 대상도 아니므로 질타의 대상이나 제압의 대상으로도 성립되지 않습니다교육이나 훈계의 대상으로도 성립되지 않습니다정신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문제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 가족의 동의서가 필요한데 가족 모두가 정신병을 함께 앓고 있는 케이스가 비일비재 하다는 것입니다그들 모두는 직장이 있고 일상적인 생활의 영위가 가능하고 논리적인 사고도 가능하긴 합니다그래서 의학적으로는 애초에 정신병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정신과 전문의조차도 정신병을 앓고 있을 뿐더러 인류의 절반 이상이 정신병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지극히 미미한 수준의 이러한 정신병을 현실적으로 심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정신병이라고 진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의 인류 문화 혹은 이 세상은 그 정도로 아이러니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세상의 행복에 대해 논할 때 바보들과 논쟁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굳이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을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의 말을 또 빌린다면 천재와 바보는 한 끗 차이라고 합니다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천재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오히려 바보들이 부럽습니다이 간단한 역사적 사실들을 왜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어떻게 저렇게 바보처럼 굴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정말로 부럽습니다거기에는 기본적으로 겸허함보다는 자신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자신감이 더 필요할 때가 많은데 넘치는 자신감이 바보들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호하고 믿어야 하는 시장(Market)은 바보들이 거래를 하는 곳이지 천재들이 나서는 공간이 아닙니다결국 바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원리는 간단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가능했는가를 보면 당대의 한국의 기업가들에게는 사업보국이라는 절대적인 명제가 모두에게 전반적으로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그러면 근로자들에게는 그러한 자세가 없었느냐있었습니다그래서 윗 선배세대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고 다른 나라보다 강한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자세는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사상이었습니다.

 

특히 먹고 살기 위하여 우리 조국의 아이들을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일만큼은 수치로 생각하거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 산업을 부흥시키고 일자리를 만들어서 직업을 통한 각자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부가 나섰다는 것입니다.

 

열악한 국가가 그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종의 테크 트리(Tech Tree)의 생리에 맞는 우선순위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적으로 재앙을 막아야 합니다기껏 모든 걸 쌓아 올려봐야 가뭄홍수산사태가 발생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재앙을 막는 것이야말로 국가다운 국가로 가는데 있어서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천포로 빠져서 죄송하지만 토양고정효과가 높은 나무들은 지진이 발생해도 재난관리가 어느 정도 됩니다. 다만 지진강도 얼마에서 어떤 수종이 단위면적당 수관비율이나 재적비율, 입목본수, 혹은 입목의 영급에 따라 버틸 수 있는지 확고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자료 정리와 자료의 제공이 안 되고 있을 뿐입니다. 산지복구 설계를 해야할 때 단에 주로 '선죽'이나 '때죽'을 심으라고 설계하는 이유는 목본아닌 목본인듯 나무라고 할 수 있는 관목형 대나무의 뿌리가 토양의 A, B 층에서 활발하게 생육하며 많은 양의 토양을 고정하기 때문입니다. 아까시나무의 뿌리 역시 넓은 면적으로 퍼져나가 땅꺼짐 현상을 막는데 효과적이며 지면으로부터의 토양 유실 자체를 막아주는 데 효과적이라서 사방사업에 주로 쓰입니다. 근래에는 비탈면 자체를 안정각으로 유지하는 추세에 따라 굳이 대나무류를 선호하지 않지만 이는 지진, 즉 땅꺼짐이나 융기 등에 대한 고려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연적인 내진설계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병리학적으로 진딧물류 등이 중간기주로 이용하며 각종 병해충이 늘어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복숭아혹진딧물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나무의사 선생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딧물류는 결코 국가적 차원의 위기로 부각될 수 없는 부차적 차원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대나무 혹은 선죽, 때죽을 보호하는 재난관리 영역의 이해도 필요하긴 합니다.)  

 

대동법의 근간을 제시한 고구려의 훌륭한 재상을파소도 재앙을 막을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다만 재앙이 닥치면 어떤 식으로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착안해서 미리 미리 쌀을 모아두자는 일종의 보험제도를 스코틀랜드의 수녀님들보다 더 먼저 생각해 냈습니다다만 스코틀랜드의 수녀님들은 이것을 금융의 단계에서 시도를 했고을파소는 백성들에게 쌀로 거둔 차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재앙을 막으면 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재앙은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 어떤 지도자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기에는 막대한 국가적 에너지가 소요되고 금세 성과가 나오지도 않으며 실패했을 경우 막대한 타격을 입습니다학문적 영역과 철학적 영역에서 더 높은 반열에 올라있었던 이승만 대통령 역시도 그렇게 실패했습니다.

과학적 영역에서 핵심을 보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만약 임업시험장을 직접 방문해보고 현신규 박사님을 기용했다면 일의 순서를 알 수 있었겠지만 어떤 연유인지 임업시험장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현신규 박사님을 기용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떡잎부터 달랐습니다국가의 테크 트리 생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공화국에서 산림법은 존재하지 않고 임시보호조치법만 갖고 있었는데, 5.16혁명 이후 바로 산림법을 제정 공포했다는 사실은 여러 번 말씀드린 일입니다.

과학적으로도 깊은 이해를 이미 하고 계셔서 아무리 나무를 심어도 황폐화된 토양에는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질소순환이 되는 국토를 만들기 위하여 아까시나무를 전국적으로 심어나갈 수 있도록 양묘의 단계부터 전문가를 배출하도록 하였습니다이 일은 사방사업법으로 진행됐는데 동법의 제정 공포시기를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전율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묘소에 아까시나무가 퍼지는 것에 분노하게 됩니다아까시나무는 산성의 토양을 선호하며 뿌리로 퍼져나가며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번식되는 성질을 가진 나무인데자신의 묘소가 산성화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만이 나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조상들의 묘소에 아까시나무나 번식시키는 극악무도하며 천륜을 저버리는 패악한 독재자이자 국가의 세금으로 나라를 완전히 망치려는 미치광이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목생리학과 미생물학, 그리고 토양학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에 불과합니다

 

(**만약 주변에 아까시나무로 인하여 매번 추석 벌초 행사 때마다 애를 먹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무의사 선생님들께서 석회 사용을 하라는 추천이나 처방전을 써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으실 것입니다묘소는 알칼리성 토양이 되어도 잔디가 자라는데 무방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분적으로 알칼리성 토양으로 만들어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요즘에는 입제로도 잘 나와서 취급을 하기에 크게 불편하지도 않습니다일반적인 봉분 크기라면 pH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까시나무가 자라는 경우 500g에서 1kg만 입제를 시용해도 충분히 넘고도 남는 양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pH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한번에 너무 많은 양을 살포하려고 하지 말고 적당량을 조금씩 연차별로 사용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또한 옥신계통 제초제와 폐유(주로 엔진오일)를 1:1로 배합하여 베어 낸 아까시나무의 목질부에 2회에서 3회에 걸쳐 바르시고 흡수시키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핵심을 보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우리는 산에 배수로 설치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과학적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무슨 정신 나간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인가 하면서 의아해 할 수 있었고 형편없는 지도자라고 조롱을 하거나 국가의 품격을 깎았다는 것으로 보여서 비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녹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공학적으로 배수로의 설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박정희 대통령은 기본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사람들은 충분히 비난하고 질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산림녹화는 온갖 이율배반적인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연료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산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땔감이 되는 나무가 연료이므로 심은 나무는 곧 땔감으로 전락하고 아무런 성과는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연탄이 좋다면서 연탄 사용을 장려하고 도벌을 하는 사람들을 엄벌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굶어죽으나 정부에게 엄벌을 받으나 매 한가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굶어죽지 않는 선택이 더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연료용 나무도 많이 심어나가면서 결국 탄광을 더 개발해서 연탄의 보급을 늘려야 했습니다보다 적극적인 에너지 산업의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아빠오늘도 무사히!’라는 표어가 새롭게 개발된 사북지역의 탄광을 비롯하여 문경 일대 탄광 입구에 걸리며그 당시는 하루하루를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야만 했던 광부의 가족들의 삶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탄광에서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갱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 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나무를 이용하여 받쳐주는 갱도 내의 갱목이 필요한데나무를 심어서 녹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나무의 소비를 늘려야 하는 모순과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얼마 남지도 않은 임업자산을 포기하고 벨 수도 없는 노릇이고국가의 지붕이 되는 녹화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목재수입을 0%의 관세로 개방하게 됩니다쌀의 경우는 얼마전까지 약 600%에 달하는 관세를 적용시키면서 한국의 수도작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육림업은 일제시대에 도입되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무 대통령 박정희 시대에 와서 전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제 1세대 독림가의 출현과 육림업의 시작은 알고 보면 일제시대에 시작된 것입니다.

갱도에서 우리나라 국민인 광부가 죽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목재의 가격이 낮아져야 탄광의 사업자들이 비교적 부담 없이 막장을 만들지 않고 그래도 기본적인 안전을 중시하는 갱도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막장이란 바로 갱목을 대지 않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탄광의 터널을 말합니다그 막장에 들어서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타인의 재앙을 막기 위하여에너지 산업의 전환을 위하여결국 연탄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막장에 들어가서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갱도목뿐만 아니라 산업을 부흥시키려면 어마어마한 목재의 양을 필요로 합니다. 당연히 개발도상국가의 입장에서는 자재의 가격이 싸야 모든 일이 원활히 돌아가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림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이 옳았기 때문에 내가 돈을 벌기 위하여 육림업이 막장이 되더라도 진짜 막장에서 죽어나가는 광부를 살리기 위하여 국내의 목재 가격이 똥값이 되어버리는 일에 궁극적인 단계에서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기존의 임업인들을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시대를 지내고 나서 10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선진국다운 면모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존 임업인들의 보이지 않은 헌신과 희생그리고 연탄사업에 헌신한 대성과 삼천리 등의 노력으로 에너지 전환은 성공하게 됩니다.

나무를 땔감으로 파는 일보다 연탄을 나르는 일이 수익이 더 좋았고 가정에선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이 좋았기 때문에 굳이 나무를 연료로 쓸 이유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존의 아궁이를 손 보고 구들장을 손 봐야했고 이어 지붕개량, 주택개량으로 이어져야 하는 수많은 과업들을 국가적인 단위에서 실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국민들 개개인이 아무리 부지런하다고 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연탄가스는 무색무취라서 언제 중독되는지도 인식할 수 없는 성질의 가스이기 때문에 이를 모르고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훗날 80년대의 통계에 따르면 연탄가스 사망자 수는 28년간 약 6만명중독은 294만명이라고 집계되는데 이는 역시 심각한 수준의 국가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 10억불 정도를 달성했을 때더 이상 경공업 중심에 머물러 있지를 않으려고 했고중공업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밀어붙였습니다역시 모두가 조롱했던 일입니다.


애초에 수출을 하자는 것부터가 조롱의 대상이었고이러한 조롱과 질책에는 관성력이 있어서 도저히 멈추지 않았습니다모든 것을 직접 경험했고 눈으로 봤으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정신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은 절대 바뀔 수 없는 차원의 문제이며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 역시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민화정책을 펼쳤던 이조시대에서 조차도 사관들은 진실을 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며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그러한 관성력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 의하여 완전히 일단락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여러 업적들산림녹화와 새마을운동에 대하여 세 분 모두가 극찬하셨다는 것 역시 우리는 간과하고 살고 있습니다물론 김영삼 대통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용서를 운운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처럼 입장을 밝혔지만 훗날 비공식 자리에서 딴 소리를 하면서 졸장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그리고 정작 IMF의 국제금융위기를 부른 지도자는 김영삼 대통령이었습니다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인지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은 운도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은 명백히 공산주의자였습니다남로당의 연락책이었고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 내부의 숙군작업에 의해 그 유명했던 김창룡 대위에게 잡혀가기도 했는데김창룡의 손아귀에서 살아나옵니다.

당시 특무대의 김창룡 대위는 숙군작업에 있어서 핵심을 놓치고 있었는데박정희 소령은 최종적으로 전향을 선택하면서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거짓 정보를 털어놓으면서 교란을 시도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들도 많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진술은 모두 일치했고 무엇보다 김창룡 대위가 찾고 있던 핵심정보들을 얻게 되면서 군 내부의 숙군작업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좀 더 바람직하게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한낱 배신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모함은 그칠 수가 없었던 것이며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인정할 수 있는 지도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자도 살아갈 권리가 있는 모순이 있는 체재라고 합니다. 물론 저는 온전히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뭐그렇다고 합니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 국가에 가서 살면 아주 행복하실 것 같은데왜 굳이 안 가시고 여기서들 이러시는지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당신께서도 공산주의자이셨으며, 젊어서 공산주의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사상에 심취하고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수준의 사고를 하는 단계를 거치고 이를 극복해야만 최종적으로 진지한 연구자의 자세와 식견을 갖출 수 있어야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왜 자유민주주의 체재가 정말 사람 살만한 재미넘치고 얼마나 아이러니한 세상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배우는 수목병리학의 영역에서 나무에 먼저 침투한 병원균이 나무와 공생하면서 내생균으로 자리잡고 나중에 침투한 병원균에 대한 저항성을 제공하여 나무를 보호하는 것 처럼 생명의 세계가 무척이나 오묘하고 그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들의 지식이 때로는 너무나 부족한 것과 같이 국가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온갖 사회현상들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성질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는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악명 높았고 극도의 히스테릭한 증상을 보이며 진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창룡의 손아귀에서 박정희가 살아나왔다는 것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너무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이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더군다나 박정희 소장을 총살하지 말고 살려주자는 의견은 김창룡으로부터 직접 제안된 보고라는 것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그게 아니라면 필자가 무식해서 김창룡 장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아직도 심한 나라라고 할 수 있어서 부족한 제가 이러한 류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물론 부담이 있긴 합니다만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은 정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은 좌우의 스펙트럼을 모두 거치며 살아온 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이나 대립에 빠져있는 것 자체를 일종의 사치라고 여겼고 시간낭비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나라를 위해서 할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고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을 살려내고 굶어죽지 않게 하고 외국으로 입양 보내지 않게 하면서 국민들이 모두 직업을 가져 자아를 실현하고 더욱 이상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즉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매우 선진적인 국가의 완성에 있었습니다.

자연보호 제창 제1호 환경운동가는 다름아닌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을 모두가 다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자연보호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널리 일반에 퍼져 있지 않았던 개념입니다.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는 국가에서 자연보호라는 진정한 개념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현신규 박사님을 기용한 것은 결코 운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현신규 박사님을 알아볼 만한 식견이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식목일 행사에는 항상 현신규 박사님을 모셔오라는 특명을 전달했습니다현신규 박사님은 워낙 겸손한 분이셔서 강의를 맡을 때는 열정적으로 산림부국론을 강하게 주창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굳이 묻지 않는 질문에는 설명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합니다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익 청장이나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수시로 현신규 박사님을 찾아뵈라고 지시를 내리고 많은 일들이 실무의 단계에서 적용되도록 단도리를 잘 해놨기 때문에 굳이 이미 보고를 잘 받고 있는데 별도로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현신규 박사님에게 물을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신규 박사님도 양보할 수 없는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산림녹화 플랜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몇 차례나 보고가 올라갔지만 실상은 모두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신규 박사님의 기준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성에 찰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아마도 산림녹화 과정을 누구보다 부족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분은 아이러니하게 현신규 박사님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취었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산림정책이 이쑤시개나 만들고 나무젖가락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가 횡행하던 80년대와 90년대가 있었습니다. 이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면에서 사실과 부합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본질적으로는 많이 동 떨어진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환경연구소장 레스터 브라운 박사님은 과거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환경사기꾼 학자였는데 한국의 산림정책도 아주 가혹하게 혹평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개과천선해서 한국의 산림사업은 인류의 큰 모범이 되는 일이고 많은 나라가 앞으로 한국의 산림녹화의 기적에 관심을 갖고 배워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일종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임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만 환경공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기억이 관성력으로 남아서 아직도 레스터 브라운 박사님을 환경사기꾼으로만 기억하기도 합니다. 

 

또한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나무는 수종별로 유전자형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어떤 토양이냐광조건은 어떠냐수분조건은 어떠냐에 따라서 생육상태는 큰 차이를 갖는다는 일명 '적지적수'의 개념을 현신규 박사님은 꼭 잘 지켜줘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계셨습니다현재 나무의사 선생님들의 기본적인 입장 역시 다를 바가 없는 것일 것입니다그러다보니 전국적으로 약 42종의 기본적인 녹화수종이 마련되어 있었는데당시 급한 상황에 산림청이 이 모든 수종을 관리하기란 역부족이었습니다.

 

42종이나되는 수종을 보급한다는 것은 일종의 서로 다른 양묘장에 서로 다른 기술과 일정 및 스케줄 관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인력도 많이 필요하고 예산도 많이 필요하며 경영학적으로 효율이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수익 청장님께서는 현신규 박사님의 학문적 주장은 과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경영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과감히 10개의 수종으로 줄여서 기본 녹화조림 수종으로 선정하였고 이를 ‘10대 조림 수종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리기테다 소나무는 10대 조림 수종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알고 보면 리기테다 소나무는 이미 미국에 있던 소나무였고 단지 현신규 박사님은 온대지방에서도 잘 자랄 수 있도록 내한성을 갖는 리기테다 소나무를 만들어 냈는데녹화의 속도에 있어서나 질소순환의 문제극복을 위해서는 당장 아까시나무와 오리나무와 같은 질소고정 효과를 갖는 나무, 즉 빠르게 산림을 녹화시킬 수 있는 나무가 오히려 더 필요하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돈이 되는 나무보다는 우선 재앙을 막는 일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재앙을 막는 것은 고대문명국가들도 시도한 일로 그런 시도에 성과를 내면 문명을 꽃 피우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이 재앙을 막는 일은 우선 기본적으로는 수문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람이 생활하는 데에는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물을 잘 통제할 수 있어야 문명이 꽃을 피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강을 중심으로 문명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수문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댐도 많이 지으셨지만 원천적으로 산림을 녹화하는 것은 더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현신규 박사님의 리기테다 소나무는 미국에서 환영받았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그다지 구미에 당기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래서 현신규 박사님은 결국 낮은 구릉지대나 물가에서나 자라는 이태리 포플러를 개량하여 산지형 포플러 현사시를 만들어 내게 되었고이 현사시는 박정희 정권의 입맛을 완전하게 충족시켜 주는 완벽한 나무였습니다.

나무가 가장 많은 강원도의 국도나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아직도 많은 현사시를 볼 수 있습니다토양정화 효과 역시 매우 우수한 종이라서 아직도 전국 시골의 축사돈사우사 옆에서 볼 수 있는 나무가 바로 현사시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현사시를 끌어 앉고 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70%에 육박하는 산지를 빠르게 녹화할 수 있는 완전한 성공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박정희 대통령의 행보를 가끔씩 보면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이 있었습니다

산에서 밥을 먹다가 토끼들을 보자 갑자기 토끼를 쫓아다니면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우리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의 대부분은 거짓에 가깝습니다.

 

전국 시찰시 밤새도록 일하다가 아침밥을 먹으러 전주의 욕쟁이 할머니 가게에 들렀을 때그 욕쟁이 할머니는 마을 곳곳에 있는 투전판이나 전전하는 그저 대통령과 조금 닮은 놈팽이 정도로 착각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매우 무례한 말들을 쏟아 부었는데그 할머니가 "생긴 건 박정희 닮아서 잘도 처먹네, 그래도 박정희는 큰일이라도 했지옛 다 계란이나 하나 더 처먹어."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하자 넉살좋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박정희를 닮은 게 아니라 박정희가 날 닮은 거예요.”라면서 투전판을 전전한 놈팽이 흉내를 내면서 밥을 먹는 내내 연실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고 합니다.

당시 수행을 맡았던 청와대의 엘리트 보좌진이나 행정관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대통령이란 자리는 그런 처우나 상황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의전을 맡아야 하는 공식적인 임무가 수행원들에게 부여되기 마련인데 아마도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녹화현장 지휘를 하다가 현장 지휘봉이 없어서 포플러 나무 막대기를 이용하다가 그냥 흙무덤에 거꾸로 꽂아놓았는데 다음날 거꾸로 꽂아놓은 포플러 나무에서 싹이 트자 포플러의 놀라운 생장력에 놀라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활짝 웃으며 덧니를 보여준 일화도 유명합니다.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은 밤 농사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는 더욱 심했습니다.

당연히 경사도가 어느 정도 완만하여 농사가 될 만한 산지에는 대통령의 의중에 들기 위하여 전국 지자체장들은 밤나무를 심도록 열심히 장려하였고 결국 밤농사로 인삼수출액을 능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습니다그린벨트 정책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밤나무를 심은 완만한 지대도 그린벨트로 지정된 곳이 많았으며 밤농사를 짓기 위하여 일종의 형질변경을 하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그린벨트에서 나무 한 그루도 맘대로 베어 내거나 뽑아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은 산지관리법상 전혀 맞는 않는 일반인들에게 퍼졌었던 거짓입니다밤농사야말로 간벌을 해줘야 하고 하층식생을 잘 관리해야 하는 농사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밤 열매와 잣 열매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설모는 그 열매들을 이곳저곳에 묻어두는 습성이 있는데 결국에 다시 찾지 못하는 밤 열매와 잣 열매가 상당합니다잣나무와 밤나무라는 침엽수와 활엽수의 조합은 매우 적은 인력을 투입하고도 우선 녹화라는 절대명제를 이어가기에 생태학과 조림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이점이 있습니다이후 산림경영학적 차원으로 간벌을 실시하면서 병리학적으로 밤나무의 경우는 파이토프토라와 같은 난균류에 잘 대처하고 잣나무의 경우는 녹병류나 소나무재선충병의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밤나무혹벌은 전후 한국의 재래종 밤나무를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전국을 쓸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저항성을 가진 품종들이 워낙 많이 개발되어 국가적 차원의 위기수준으로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개발되지 않은 기존의 재래종으로 수백년 된 밤나무(노거수보호수천연기념물)들도 당연한 이치겠지만 저항성 인자를 획득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잣나무 털녹병 역시도 세계적으로 극심한 수준의 질병이었기 때문에 밀의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여 인류의 식량난에 기여했다는 의미로 노벨상을 탄 볼로그(Norman E. Borlaug) 박사는 직접 현신규 박사님이 있는 당시 수원의 육종연구소를 방문하였습니다볼로그 박사가 현신규 박사를 찾아온 연유는 이렇습니다.

미국와 영국에서는 특히 잣나무 털녹병이 심했는데 털녹병에 관한 연구는 미국 주립대 아이다호에서 30년간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그 연구비는 NATO와 미국 산림과학연구원이 지원을 해줬는데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수목의 질병 연구에 도움을 줬다는 것은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 질병으로 여겨졌는지를 직접적으로 시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아이다호 주립대학은 30년간의 연구 끝에 한국의 잣나무와 대만의 아만디 잣나무가 털녹병에 저항성이 강한 편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창경궁에서 솔잎혹파리를 1929년에 발견하여 그 연구를 우리에게 전해준 다카끼 고로꾸 산림보호과장은 이어 1936년에 가평 잣나무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병을 발견하고 즉각 식물병리학자였던 히라스카 나요히데에게 보내서 털녹병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그런데 웬일인지 이 병이 발생하면 지속적으로 퍼져나갔어야 하는데 1965년이라는 약 30년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는 거의 잠적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랜 연구를 한 아이다호 연구팀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이 될 때 일본의 철수 명령과 함께 물러가는 임업시험장의 일본인들은 소중한 자료를 없애버렸는데 다카끼 산림보호과장은 철수명령을 어기고 솔잎혹파리의 연구가 꼭 이어지기를 바란다면서 미군정에 의하여 임명된 초대 임엄시험장장 현신규 박사에게 죽음을 무릎 쓰고 그 연구를 전달하였습니다하지만 털녹병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없었다는 것을 보면 발생빈도에 있어서 그다지 심각한 질병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이다호 주립대학의 연구소장 빙햄(Bingham) 박사는 현신규 박사에게 한국의 잣나무와 대만의 아만디 잣나무를 국제심포지움에서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현신규 박사는 대만 대학의 협조를 얻어 자료를 준비하여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산림연구소는 잣나무 털녹병의 중간기주가 까치밥나무라는 것을 밝혀냄에 따라서 중간기주 제거를 통해서 잣나무를 보호하려고 했는데나무 숫자가 너무 많아서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그래서 현신규 박사님의 임목육종을 이용해서 내병성 수종 개발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왜 쓸데없이 사람을 부르겠습니까털녹병에 대해서 현신규 박사님보다 몰라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 정도로 현신규 박사님의 임목육종 실력은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습니다그러나 잣나무는 소나무와 같은 속(Genus)임에도 생육특성상 육종 연구가 매우 까다로워서 결론적으로 연구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털녹병의 잠복기간은 3년 이상이기 때문에 접종을 하더라도 발병을 하지 않아서 연구에 애로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다만 잣나무는 열매나 목재로서 중요하고 비중 있게 이용되는 나무로서 특히 스트로브잣나무는 털녹병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마구 들여왔다가는 한국도 큰 피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현신규 박사는 수원의 임목육종연구소에서 내병성 육종에 착수하였고현지에서는 병에 걸리지 않은 잣나무를 다수 선발하여그 개체들로부터 삽수를 채취하고 번식을 시켜서 다수의 클론군을 분류하고이들 클론에 대해서 포지에서 인공접종에 의한 내병성 검정을 실시하였고 현지에 식재하여 자연감염에 의한 검정을 병행하였습니다.

 

볼로그 박사 역시 그러한 일련의 연구과정을 직접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잠복기간이 너무 길어서 현신규 박사님은 결국 내병성 수종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당시 서울대학교의 나용준 교수님과 임업시험장의 이창근 박사 연구팀은 털녹병의 중간기주가 송이풀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강원도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눈잣나무 털녹병의 중간기주가 송이풀이라는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었습니다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경우 까치밥나무가 중간기주로 역할 하는 것도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송이풀로 가는 녹병균과 까치밥나무로 가는 녹병균이 같은 계통의 같은 종인지에 대하여 이견과 논란이 한동안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는 저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 누군가 아시면 귀띔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물론 어차피 처방면에서 크게 달라지는 바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업무면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겠으나 우리가 연구자들의 고뇌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릴 필요도 있다는 차원의 필요성은 느끼게 됩니다.

 

아무튼 이러한 점을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부터 시작한 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고건 총리 작성)’ 기간에 송이풀의 제거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물론 이것은 현신규 박사님과 임업시험장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현신규 박사님은 나무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범 임학 분야를 이끄는 중심에 있었습니다

산림해충 번데기 연구까지 직접 하시기도 했습니다산림을 녹화하기 위해 너무나도 간절해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국 정밀 토양 조사사업 역시 현신규 박사님이 농촌진흥청장으로 계실 때 시작한 일로서 토양 환경을 알고 농사도 짓고 나무도 제대로 심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양학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수목학에 미친 영향은 지난번 글을 통해 소개해드렸고 현신규 박사님의 학위논문은 자료실에 올려드렸습니다. 즉,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토양학 자체는 수원고등농림학교 시절부터 스승이었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조백현 박사님께서 외국에서 지원되는 비료가 한국의 황폐화된 토양에서 이온의 단계로 원활히 녹아내리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가 필요했고 후학의 양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국에서 새롭게 써 내려간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 분야의 범위를 고려했을 때 우리가 현신규 박사 선서를 했을 때 농촌진흥청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범위를 갖는데 있어서 무리가 없다는 것이고해충분야병리분야, 분류학, 수목학, 수목생리학, 토양학 분야 모두 수긍할 수 있을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현신규 박사의 후예라는 것을 주장하면 다른 사람들은 현신규 박사가 누구야?” 하고 나올 수밖에 없고우리는 그 때 너네 선배님이기도 해.”라고 말해주면 여러 가지로 업무 협조를 받는 데 있어서도 수월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고건 총리 역시 내무부 시절부터 이러한 산림녹화의 기적과 새마을 운동을 이끄는데 많은 공로를 세워 훗날 노무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내각의 총리를 맡게 되었고, 헐리우드 미국 영화, '원초적 본능'의 주연 배우, 샤론 스톤 마저도 약 20여년전 이러한 고건 총리의 공로와 업적, 그리고 자조의 정신을 실천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아보고 고건 총리 내외를 직접 영접하며 식사대접을 할 정도였는데,  2023년의 한국의 나무의사 선생님들이 '현신규 선서'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세기적인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영화배우 샤론스톤보다는 한국의 나무의사선생님들께서 한국의 산림녹화의 기적이나 새마을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열심히 앞장 서서 전파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생각이 어디까지나 무조건 옳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샤론 스톤은 어디까지나 미국 사람이고 우리는 한국사람인데, 어려웠던 시절 미군에게 Give me, chocolate! 이나 외쳐야 했던 가난했던 시절에는 불가항력적인 환경의 영향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지도 않은데, 이런 일 마저 한국인인 우리가 스스로 하지 못하고 미국의 스타가 대신 해 주는 일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면 정말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샤론 스톤에게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고 깊은 철학적 식견에 놀라며 존경하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톰 크루즈는 또 어떻습니까? 아무 생각없이 '의리!'를 외치며 유행어를 따라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원래 예전부터 대놓고 한국을 무시하는 일본인 기자들 앞에서 한국인도 아닌데 한국인보다 더 기분나빠하던 사람이 바로 톰 크루즈였습니다. 영화계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여러 케이스가 있지만 삼천포로 빠질까봐 이만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래의 일을 이미 예측하고 현신규 박사를 이곳저곳의 기관장으로 임명했는지에 대해서는 감히 단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하지만 63년도에 임학박사 1호를 농업진흥청장으로 임명한 것은 일반인들의 식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수가 이미 담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토양분류와 농화학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토양분류는 차이를 갖게 될 수밖에 없는데 3공화국의 가장 처음 임명을 현신규 박사로 지목했다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나무를 심는데 있어서 얼마나 진지했으며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모두 아시겠지만 산림청은 63년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67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신설한 국가기관입니다.

이것은 운이 아니라 철저한 실력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운은 육영수 여사님을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그것은 우리 국민들에게도 큰 행운이자 행복이었습니다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는 우리의 옛 말은 거짓 가정입니다물이 맑은 곳이라야만 자랄 수 있는 어류는 많습니다.

박정희 소장이 청렴결백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이에 감동한 많은 군인들이 정군활동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소장을 따랐던 것이고 육영수 여사님 역시 박정희 대통령을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 사랑을 받아준 것입니다.

과거 군인들의 월급은 박봉이었고 박봉의 월급은 몇 몇 개인이 아무리 청렴하고자 노력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그 조직은 수많은 부정과 부패를 만들게 되는데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스스로 청렴결백하고자 한들 다른 남편들과 비교하며 바가지를 긁고야마는 아내와 짝을 이루었다면 오늘날의 위대한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무대통령이라는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업적을 달성한 대통령의 국가적 출현과정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으므로 조금 만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계획은 이미 관계자들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박정희 소장이 얼마나 청렴결백한 사람인지를 모두가 알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제압하려고 하는데 있어서 진지할 수 없었다는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제압하라는 명령도 혼선된 루트로 내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압할 수 없는 능력을 소유한 부대로 전달된 것으로써 진정으로 제압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미국이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미국도 원한 일이었으며 미국에 의해 더욱 부채질 된 일이었다는 것을 한국인들만 잘 모릅니다. 연구자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에 불과합니다. 물론 미국이 원했던 인물은 박정희 소장이 아니었고 송요찬 장군이었습니다. 당시 하우스만 군사고문은 대놓고 송요찬 장군에게 언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냐고 묻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애초에 제1공화국에서 3.15부정선거에 대한 계엄사령관 자리에 송요찬 총장이 앉게 되었고, 4.19운동의 주체라고 여겨졌던 학생 대표단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의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데이 때 열혈청년 학생대표는 계엄군에게 정권을 넘겨야 한다는 얘기를 했고결국 송요찬 총장은 훗날 과도정부의 허정 선생의 매서운 눈을 속이지 못해서 미움을 샀고 정치권에서는 명성을 떨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훗날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립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송요찬 장군은 1군단장 시절 당시 참모장 박정희 장군의 제안에 따라 군대의 산림관련 후생사업을 끝낸 혁혁한 공로가 있으며 전쟁 당시에는 빨치산(Partisan)토벌에 있어서 그 용맹을 인정 받아 미국으로부터는 '타이거 송'이라는 애칭과 함께 국내에서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담은 '석두장군'(石頭, 돌머리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후생사업이란 군인들이 박봉의 월급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나무를 베어 팔거나 군 수송차량을 업자들에게 빌려줘서 임차료를 받아 군대의 살림살이나 군인들의 월급으로 지급하던 방식의 사업을 말합니다.


당연히 4.19 이후 계엄사령관으로 앉은 송요찬 장군에 대한 이미지는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으며 일반 국민이나 미국은 군대가 정권을 쥐기를 바라는 강한 인상을 주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잡지, '사상'(일명 사상계)은 인쇄물부터 그 비용이 전략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의해 운용되는 잡지였습니다. 사상계 장준하 선생마저도 왜 군대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당시 시대상황을 비판하였고 김포의 모 군인행사에서 강연을 할 때는 장교들을 상대로 질책도 하고 그러던 시절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군 장교들은 일면식도 없는 다른 장교와의 출근길 버스, 첫 대면에서 '우리 혁명합시다'라는 대화를 일반 시민들이 들으라고 할 정도로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래야 되는 줄로 모두가 생각하고 지내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5.16 당일 윤보선 대통령은 선 계엄선포 후 재가의 문제를 승인의 차원 정도가 아니라 계엄선포는 잘한 일이라고 칭찬까지 해주었습니다. 청와대 회의에서의 첫 대면에서의 대화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인데 윤보선 대통령의 첫 대화는 '올 것이 왔군요.' 였습니다.  5.16 당시 청와대에서의 대화의 기록은 당시 윤보선대통령, 현석호 국방장관, 장도영 총장, 김신 공군참모총장(김구 선생의 아들), 유원식 대령(무정부주의를 주장한 독립운동가 유림의 아들)의 기록이 상이한 관계로 온전한 진실에 다가서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만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사실은 5.16은 통수권자에게 승인을 받았다는 것과 윤보선 대통령의 첫 대화, 현석호 국방장관의 억울함 호소, 그리고 이에 대한 윤보선 대통령의 따끔한 일침 정도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신 공군참모총장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이해당사자였지만 김신 공군참모총장은 전혀 관계된 바가 없는 가장 객관적인 위치와 환경에 놓여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은 온전한 것으로 여겨질 성질로 애초에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이원내각제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총리의 갈등은 너무나 과도할 정도였기 때문이며 일명 민주당 신구파 갈등을 낳고 그 결과로 5.16을 부른 당사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분은 윤보선 대통령님과 장면총리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당 출신의 곽상훈 의장님이나 박순천 의원님도 시대적 해석에 있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훌륭한 면모를 보여주신 민주당 어르신들 이셨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곽상훈 의장님은 훗날 박정희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구수한 사투리로 아주 통쾌하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잘 하고 있다면서 일방적으로 몇 번이나 칭찬을 반복하여 오히려 박정희 의장을 당황케  한 분이었습니다. 민주당 신구파 갈등으로 인하여 누구보다 곤혹을 치르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민주당 출신의 곽상훈 의장님이라는 것을 당시 박정희 의장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5.16에 대하여 장면 총리 역시 검찰과 경찰로부터 세세한 보고를 받았지만 때로는 엉뚱하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했고, 이미 다 사라진 민족청년단의 잔당이 쿠데타를 꾀하고 있으니 잘 알아보라고 지시하기도 했으며장도영 합참의장에게 박정희 소장의 계획을 3번이나 확인했으나 장도영 의장이 거짓 보고를 하는 바람에 진실을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좋은 핑계거리를 갖게 되었을 뿐입니다

칼멜 수녀원으로 피신한 이후 언제라도 진압명령을 공식계통으로 발동하여 당시 현석호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했다면 제1군단장을 맡고 있었던 박정희 소장의 동기생인 이한림 군단장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그러나 약 6만명 이상의 병력을 지휘하는 이한림 장군에게 고작 3천명 정도의 혁명군 병력을 진압하라는 그 어떠한 공식명령도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장면 총리께서 스스로 자신의 부덕함과 잘못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장면 총리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면 역사의 죄인이 되었을 텐데 실제로 깨끗하게 물러나셨고 그분의 아들장익 주교는 카톨릭에 귀의하여 한 평생을 사시며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일생 내내 정치권과 거리를 두실 정도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박정희 소장은 김도연 의원(민주당 구파)도 만나 자금과 관련된 상의도 했습니다. 김도연 의원의 화법에는 '그런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화법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그 만남에서 그 표현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세어보았는데 1시간이 남짓한 만남 시간 중에 무려 36번이나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가 화려한 전적을 가진 독립운동가 출신들입니다. 당연히 제1공화국에서부터 활동한 분들이고 이분들 모두 5.16에 대하여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거나 동참하거나 응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심지 않은 후대의 사람들이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의 해석을 정면으로 위배하여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을 말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16은 정당의 역사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민주당 출신들이, 더군다나 제1공화국 한민당 시절부터 활동한 독립운동가 원로분들이 이룩해 낸 업적입니다. 당시 자유당은 완전히 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민주당에서 이 위대하고도 숭고한 업적을 부정하는 것은 과거의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당에 아무리 계파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해석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요상한 슬로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파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로 바꾼다면 논리적으로는 성립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바람직 할 리가 없기 때문에 역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본인들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5.16을 무슨 범죄나 되는 양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박정희 소장은 3.15 부정선거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용기있는 자세로 저항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군인이었고 이는 민주당 내에서 이용 가치 면에서 매우 훌륭한 카드로 성립되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군 예편 목록에 박정희 소장까지 포함되어 토사구팽 당하는 위기의 순간까지 치닫자 은인자중하던 군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5.16이 일어난 것이며 이를 세상에 천명하였습니다. 4.19로 인하여 박정희 소장의 혁명플랜이 틀어졌다는 것 정도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배꼽빠지도록 재밌는 상황이냐하면 당신들께서 우리 인류 역사에 어마어마한 성과를 내고는 갑자기 남들을 탓하면서 그 일을 죄악시 하는 오묘하고 알 수 없는 권력쟁탈전의 논리에 함몰되어 순수한 역사적 과업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주당의 모순과 딜레마가 있었던 이유는 오랜 시간 나름 독립운동을 한 자신들이 한낱 권력쟁탈전에 함몰됐다는 증거가 국민들에게 발견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독립 이후 권력쟁탈전은 가속화되었고 6.25 전쟁 중 부산 피난 국회에서 세비를 올려달라는 요구는 누가 봐도 도를 지나친 것이며 애초에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려고 들었던 얄팍한 술수를 훗날 국민들이 눈치 채지 모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더 훗날 발달하게 되는 정보처리의 발전과 가능성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훈령 217조는 전쟁 중 당시 박정희준장이 이종찬 참모총장의 발표문을 대신 작성한 것으로 그 진정한 의미는 '군은 참아야 한다'가 아니라 엄연히 '군은 분노하지만 참겠다.'는 뜻인데 이를 두고 국민들이 원문을 쉽게 읽어보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국문학 전공 역사학자들의 단편적이고도 짧은 생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차원의 유치한 발상이나 거짓에 가려져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삼국사기의 내용을 교묘하게 바꾼 외세 국가들이 훗날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당시의 일식이나 월식 기록을 고증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어설픈 역사 조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김부식이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김부식이 신라시대의 월식 기록을 정확하게 관찰하여 기록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전해진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고려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당했고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이후 각 나라의 사실관계를 교차검증하면 상당수가 조작된 것이거나 오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일식이나 월식과 관련된 기록은 그토록 정확하게 서울대 박창범 교수팀에 의하여 복원될 수 있는지 의미심장함 마저 느끼게 됩니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모략 중에 대표적으로 육군훈령 217조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읽으면 당시 살인사건을 이해해야만하고 그 살인사건을 이해하게되면 결국 부산정치파동까지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연결됩니다. 부산정치파동을 이해하면 한국 근현대사의 초기 맥락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거짓이 많아서 가시덤불을 헤쳐 나오는 또 다른 교차검증 과정이 필요합니다만 누군가가 맥을 짚어보게 된다는 것은 거짓을 좋아하고 선동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매우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민주당의 입장에서 이러한 모순과 딜레마는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총리를 통한 신구파 갈등으로 커지고 이어 유진산의원과 박순천 대표와의 갈등에서는 극에 달해서 내부로부터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과정은 그야말로 치열했기 때문에 5.16을 정면으로 부정해야 하는 현실이 주어졌던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애초에 박정희 소장은 독립운동에 매진한 민주당 원로들에게 어린 애나 다름이 없어서 직접 민주당 원로들이 상대한다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민주당 소장파를 밀어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김영삼, 이철승,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소장파 신세대 민주당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5.16이전부터 활동한 김영삼, 이철승과는 달리 5.16 이후부터 한국 정치사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김대중 대통령의 삶의 궤적 역시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한림 군단장 역시 당시 계엄법에 의하여 부여된 권위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얼마든지 혁명군을 쿠데타 군으로 규정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윤보선 대통령에게 후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명령을 기다렸으나 명령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선 조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한림 군단장이 바보도 아니고 역사의 죄인으로 이름을 남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당연히 공식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에게 합법적으로 부여된 권리 사용을 거부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권리를 쓸지 말지는 그 권리자의 판단입니다. 이에 반해 당시 박정희 소장은 합법적으로 부여된 계엄법을 철저히 준수한 것에 불과합니다. 명령계통상에서 그리고 당시 계엄법상에서 하자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모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계엄을 재가한 것이고, 당시 국회의장은 통쾌하다고 추켜 세운 일이고, 내각 총리는 깨끗하게 물러난 것이고, 합참의장은 아예 재건최고의장의 자리에 취임한 것이고, 1군단장은 기다리는 제스쳐로 일관했으며 민주당은 뒤에서 남 모르게 도왔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후대의 우리가 아무런 진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진실을 모르니 거짓 교육이 횡행한다는 것입니다. 


5.16혁명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이며 알송달송한 혁명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사 당일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혁명군이 당시 법을 준수했으며 둘째는 무혈혁명이었고 셋째는 주로 회의과정으로 일관된 대화를 통한 혁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육본회의에 이어, 청와대회의가 이를 증명하며 이전에도 연판장 돌리기, 육사8기, 9기, 10기의 총장 면담신청 등 무력사용과는 매우 거리가 먼 행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장도영 총장이 보낸 약 50명의 헌병대원과 한강대교에서 교전이 있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대부분의 혁명 과정에서는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는 것이며, 회의 같은 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훗날 이한림 장군은 자신의 진의를 제 때에 제대로 간파해주지 못한 모자른 친구 박정희 대통령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나무랐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했기 때문에 후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크게 기여하시게 됩니다.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총장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혁명 플랜을 보고하였으며인류사의 중요한 혁명에 대해서 본질적인 차원의 연구를 김종필에게 지시하여 오랜 기간 준비한 끝에 치룬 거사였습니다혁명 전날에도 올라간다고 다 보고를 한 일이었고 이미 얘기가 다 끝난 일이었는데 사건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막상 당일날 조금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장도영 의장이 애매하게 돌변하자 그 위급한 상황에서 써 내려간 편지 문장은 가히 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급한 그 시간대의 문장들은 여전히 매우 정중한 문장들로 냉정하게 정제된 단어들만이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그 속뜻을 냉정하고 격의 없이 독해 해 본다면 당신, 나랑 말 다 맞춰놓고 이런 식이면 나도 후대들에게 정확하게 이 일에 대하여 나의 입장을 변호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위하여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두분 사이의 공방은 우리가 온전한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아무튼 미시간 대학으로 건너가 교수를 하게 된 장도영 의장은 훗날 MBC와의 인터뷰에서 쿠데타를 막으려고 진심을 다했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그 입장을 누구도 믿기 어려운 이유는 생과 사를 오가며 6.25 전쟁 당시 파로호대첩의 영웅이었던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를 정말 막으려고 했다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리에 앉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5.16 당일날 날 쏘고 가라!’고 했어야 말이 되는 것이고애초에 장면 총리를 속일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소장은 그럼에도 장도영 총장의 권위를 불러올 필요가 있었습니다장도영 총장은 엄연히 을지문덕 장군이 울고 갈 정도로 그것도 현대전에서 이룬 '파로호 대첩'의 영웅이었지만 박정희 소장은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진급 누락이 심했던 편이라 한 살 위의 정일권 장군이 6.25 당시 참모총장직을 수행할 때에도 기껏해야 소령에 머물러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무게감 있는 장군급 영웅으로 인식되지 못했고당시 국민들에게 혁명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장도영 총장의 권위가 훨씬 더 유리했습니다.

 

원래 군인 박정희는 작전능력이 뛰어나서 당대의 전쟁 영웅들장도영김종오백선엽송요찬, 이종찬 등 명망 있는 대부분의 사령관들이 서로 채가려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실제로 그분들 모두는 군인 시절 박정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던 분들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김구 선생의 아들김신 공군참모총장은 이미 6.25 전쟁의 영웅이었는데 5.16혁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습니다보안유지를 위하여 공군에게는 애초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한 일이었는데 국가적 차원의 사고가 가능했던 김신 총장의 뜻밖의 지원사격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민족지도자라고 추앙받는 김구 선생의 아드님으로서 6.25전쟁 당시 무스탕 편대를 이끌며 최선전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이 뭐가 아쉽다고 까딱하면 잘못될 수 있는 혁명을 지원하고 나섰겠습니까그분이 무슨 이유로 5.16혁명을 지지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김신 총장님의 삶의 궤적은 우리 역사교육에서 김구 선생의 죽음과 함께 묻혀버리고 마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분은 엄연히 6.25 전쟁영웅이시고 대한민국 공군을 최선두에 이끌어 현재의 반석위에 올리신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완전히 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는 편파적인 거짓 역사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조직적이고도 악의적인 선동체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거짓가정이 너무 많아서 결국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어설픈 선동을 하는 공산주의자들만 모른다는 것입니다손바닥으로는 절대 하늘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이미 만주국이 세워지기 훨씬 전인 자유시참변으로 인하여 만주 일대에서 모조리 소련으로 끌려간 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기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또한 이분들 거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매료되거나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으로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만날 수 있는 독립군은 없었습니다자유시참변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으로 3살 때 일어난 일로 3살
짜리 꼬마아이는 독립군을 학살할 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또한 꼬마 아이는 군 장교로 임관되지도 못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꼬마가 어른(독립군)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살고 있는 지역 자체가 약 500km 넘게 떨어진 너무나 먼 거리에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악의적인 판타지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아직도 이러한 거짓을 바보처럼 믿고 있는 선량한 국민들은 부지기수입니다.

때로는 매우 답답하지만 이러한 패턴에는 여전히 우리가 배울 교훈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역사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았기에 이렇게 일말의 개연성이나 가능성도 성립되지 않는 거짓을 믿게 되냐는 것입니다독립운동사를 조금만 알아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진실의 영역이자 논리의 영역이 엄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비겁했기에 일말의 개연성이나 가능성도 없는 얘기를 해대는 황당한 소설이 횡행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입니까또한 우리가 얼마나 게을렀기에 이러한 일들을 제대로 시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하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은 정말 나무에게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선 나무의 생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국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 역시 정말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인 거짓선동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하는 것은 결코 나라를 위하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혁당 사건의 중심에 있었으며 한국 내에서 밀봉교육이라 불리는 최고 수준의 대남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표병관 선생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의 아들로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조작되었다고 믿고 있는 인혁당 사건의 모든 관계자들과 가장 밀접하게 교류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표병관 선생은 세상의 분위기나 기세에 무릎 꿇고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를 민주화 운동이나 되는 양 착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 참 신기한 나라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왜냐하면 표병관 선생님의 눈에는 그 누구도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한데공산주의자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일반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논리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국가적 위기를 느끼게 됨에 따라 전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진실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진실화해과거사규명위원회를 하고 있으면서 무슨 대단한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 마냥 행동하는 위선이 제 눈에도 다 보이는데 표병관 선생님의 눈에 왜 안 보이겠습니까? 그분은 살면서 온몸으로 공산주의 선동을 배운 분이니까요. 

 

북한의 밀봉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한국 내 세력은 극소수 중의 극소수 입니다.

NL계열이나 PD계열 혹은 CA계열이 생성되기 훨씬 더 이전 단계에서 공작된 일들이라서 NL계열들조차도 밀봉교육이 뭔지도 모릅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조선노동당과 궤를 같이하던 남로당 계열의 인물로서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분입니다애초에 엄한 사람 잡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리고 진짜로 전향을 했습니다그분의 삶이 증명합니다당시에 미국은 계속 박정희 대통령을 의심했지만 결국 수많은 장성들은 기꺼이 신원보증에 나섰습니다.

이에 비해 온갖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무런 개념이 없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도 하지 않고그래도 뭔가를 좀 알고 있다는 알 수 없는 행태를 보이면서 쓸데없이 아는 척을 하려는 습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왠지 나도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조바심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그렇게 세뇌되고 일정부분은 압박당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여러 가지 선동에 그냥 넘어가 버리면서 비교적 다수의 목소리를 쫓아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고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안도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배신자이고, 그 배신자에게 씌우는 온갖 모함, 모략, 그리고 비방에 대해서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화되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납득할 수 있는 노릇인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성질의 이유로 얼마전 2023년 7월 21일 MBN 7시 뉴스의 특별프로그램 김주하의 그런데’ 에서 김주하 앵커는 대표적으로는 '가짜뉴스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광우병 선동세월호 선동천안함 선동싸드 선동 등의 가짜뉴스를 대표적으로 언급하면서 그렇게 가짜뉴스에 당하고도 가짜 뉴스로 판명이 났는데 계속 당하는 이유는 발설자나 유포자를 처벌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겠느냐며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링크를 걸어드립니다불편하시겠지만 복사해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U8eaKhVwCQ

 

MBN의 위선 역시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은 맞습니다본인들은 뭐 그런 가짜뉴스에 전혀 올라타지 않은 것처럼 선을 확 그어버리면서 매우 깨끗한 척을 하는데 정말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처벌로 이 세상의 거짓가정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하늘나라가 임했을 것입니다처벌로는 절대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지 못합니다더군다나 정신병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의 바보 같은 소리에 반응하는 것 자체 역시 바보짓이라는 것입니다물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들이 하는 너무 정도가 지나치고 위험한 악의적인 선동은 경우에 따라 기술적으로는 처벌을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그것은 법률가들의 영역이지 결코 우리의 영역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물류이동을 극대화하며 국민을 위해 산업을 부흥시켜 강한 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은 한낱 본인들끼리 차를 타고 다니며 민중을 착취하려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보이는 대로 말하는 최소한의 용기가 있었으며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람직하다고 상을 줄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나름 용기와 양심이 있는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하는 발상은 삼청교육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조의 가치를 이해하고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기보다는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숭고한 가치는 세상을 분명히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증명해 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운좋게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위대한 철학과 사상, 그리고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이며 육영수 여사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진실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유의미하게 전달한 기자에게 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조의 정신입니다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셨던 정신이었고 산림녹화의 정신이며 산림인들에게 녹아내려 있었던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더 많이 배우고 익힐 시간적, 환경적 여유가 제공된 후대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사고수준을 보이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조차 없습니다.


이는 이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계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분들이 나무의사 선생님분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대통령 박정희나무박사 현신규나무의사 홍길동이라는 관계는 찬란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광된 연결고리입니다.

얼마전 우크라이나는 국가적 차원의 캠페인 영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가난했던 대한민국을 수출 6위의 강한 국가로 변신시킨 위대한 지도자라고 극찬하면서 자신들도 대한민국 처럼 할 수 있다는 영상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도 역사학자들도 피상적인 수준에서의 분석만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민들이 연탄 중독 사망으로 수만 명이 죽어나간다는 것은 결국 석탄산업이 아닌 정유산업, 화력발전으로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석탄도 마찬가지지만 기름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도로가 깔려야 하고 차량이 있어야 합니다또한 중화학공업은 어마어마한 양의 철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철강업도 손을 대야 합니다. 중화학공업은 또한 많은 양의 전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원자력으로 눈을 돌려야 했습니다.

결국 나라에 나무를 제대로 심으려다가 온갖 산업을 다 일으켜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고 그렇게 지성이면 감천이다보니까 결국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중화학 공업의 시대는 이미 박정희 대통령이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집권 동시에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0만불 수출을 이룩하고 나서 결국 산림녹화에 성공하기 위한 집념으로 그 후속단계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자 숙제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삶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단위에서 나무를 심고 자연을 보호하며 공존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저의 해석이 비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검산의 차원에서 한번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던 대통령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열심히 일했겠습니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늘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평가를 맡긴다고 했습니다그래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욕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는 연세대 학생들을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차를 세워 학생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문을 열고 걸어나갔습니다물론 연세대 학생들은 차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겁을 먹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무슨 수로 어떻게 산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언급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바로 나무를 깊이 있는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바로 여러분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그 분야의 평가를 하는 것이 온당하고 마땅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제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깨닫게 된 우리의 소명과 사명에 대해 알게 된 바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국가가 혹은 그 문명이 이용하는 에너지 체계를 보면 그 나라와 문명의 발전상황이나 속도를 볼 수 있습니다.

황폐화된 국토에서의 질소순환체계를 갖추고 해결하는 어려움을 국문학을 전공한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이해한다는 말입니까?

연료림 에너지체계로 버티면서 석탄 에너지체계를 손보고, 석탄 에너지체계로 버티다가 화력발전, 수력발전, 원자력 발전으로 급속도로 넘어간 것 역시 모두 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제대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이유가 알고보면 산에 심어놓은 나무들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는 것을 알면 정말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화력, 수력 발전체제의 에너지 이용체계에서도 산림녹화의 사명은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전히 80년대, 90년대에도 여전히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지피며 난방과 취사를 해결하는 가구가 많았다는 것은 저의 주장을 뒷받침 할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뭐 그렇게 대단한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산림=부국이라는 산림부국론이라는 것입니다.

원리는 매우 간단하지만 가치는 숭고하도도 위대한 진리에 수렴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습을 갖습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는 각각의 단계에서는 어마어마한 과학적, 기술적, 행정적, 법적, 사회문화적인 지식을 요구하게 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우선은 지도자의 철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하나?'라는 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정신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바른 관계 혹은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후대에 국문학을 전공한 역사가들이 평가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학을 통해 자연철학자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사람들, 즉 나무의사 선생님들께서 볼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인류사에서 국가를 발전시키려고 진심으로 노력했던 지도자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만큼의 업적을 이룬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 뭐 할까?'라는 질문에 '응, 나는 나무심을래.' 하신 분이고 현신규 박사는 '응, 나는 나무 연구할래.' 하신 분이며 나무의사 선생님들은 '응, 나는 아픈 나무 고쳐줄래.'라는 답을 내리신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단계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제대로 평가해 줄 수 있는 그 후대의 역사가들은 바로 나무의사 선생님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굳이 함부로 하지는 않지만 나무의사 선생님들이라면 모두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으며 존경받고 사랑받고 영광을 누리실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 분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삶의 경로가 달랐다면 저의 이야기가 매우 당혹스럽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의사 선생님들이라면 지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저의 사견이자 소고(짧은 생각)로써 동의하시거나 못하시거나 각자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과연 독재자가 왜 이렇게 미쳤다고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을까? 혹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분이 뭐가 아쉬워서?'라는 검산차원의 질문을 해보면 현재까지 역사가들의 논리는 그 개연성에서 매우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분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극소수의 산림인들이 본질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훼손시킨 것을 만회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분석 역시 외형적으로는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애초에 훼손시킨 적이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분석에 불과한 오류입니다. 이러한 오류는 당시 계엄법이나 군대의 생리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리이며 본질적으로는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화제 국가에선 헌법 역시도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이 헌법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낱 개정의 대상으로 성립됩니다.

국민이 굶어죽고 있다면 얼마든지 바꿔야 하며, 바꿔서 국민을 굶어죽지 않게 했다면 아주 잘 한 것이므로 장려의 대상이자 모범사례라고 봐야 합니다.  과거 우크라이나 정부의 캠페인 영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모범사례라고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인간이 숭배할 수 있는 대상은 신(God)외에는 없습니다. 그게 공화제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입니다. 공화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왕정제 국가에서는 왕을 숭배할 수 있고 숭배해야 합니다. 그게 왕정제입니다.

그리고 왕의 수고스러움과 피곤함 혹은 번거로움이나 고달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왕을 숭배하는 백성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현대식 정치체재는 내각제를 지향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대한민국에는 이미 왕이 사라지고 없었는데 억지로 이원집정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오류중에 오류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지나치면 이렇게 하늘 아래 두 태양을 만들어놓고 권력에 집착하면서 뻔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수치 혹은 오류를 목숨 걸고 제거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화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사기적 단어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공화의 가치가 그늘에 가려져 우리에게 부각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화주의(Republicanism, 共和)에 대해서도 말씀드려야 하지만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 건방을 떠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만하겠습니다. 

가급적 글을 짧게 쓰려고 했는데 매번 삼천포로 빠져서 주제넘고 건방지게 말이 너무 길고 산만한 점은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장육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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