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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건국대 명예교수님의 글, '조선왕조시대의 당쟁정치 고찰' 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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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시대의 당쟁정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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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산림정책연구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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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없는 현재와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에 우리들이 역사를 배워 익히는 이유는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조명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역사에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미래를 인도하는 교과서적 ‘지침서’이므로,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자취는 모두가 후세들에게 값진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시대를 살다 가신 선인들의 삶을 반추해서 이를 ‘온고지신’으로 삼아 평소 생활에 있어서 수신제치를 이룩할 수 있는 마음의 양식으로 간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우리 시대와 근접한 조선왕조시대에 유교적 정치상황을 고찰하여 여러분과 함께 그 내용을 새삼 논의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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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말선초의 시대적 배경
고려왕조 말엽에 난세를 당하여 사회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당시 정치판도는 수구적 온건세력과 개혁적 신진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개혁신진세력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가 도덕적으로 부패했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유교를 국정기조로 하는 조선왕조 개창을 선택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후, 일부의 훈구세력들이 국정을 주도하고, 특히 태종대에 이르러 왕권강화론자들은 정국안정에 따른 ‘불사이군’의 정책으로서, 고려유신들을 객관적 기준 없이 충신과 반대세력으로 양분시켜, 이를 옹호하거나 제거하는 정책을 펼쳤으므로, 학덕 높고 지조 있는 사대부는 정계 은퇴와 출사 거부의 사태까지 발전했다.
당시의 정세가 이와 같기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세력은 충신으로 평가받고,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이 시대에 벼슬한 세력들은, 모두 ‘변절자’로 폄하 당하는 정치적 ‘아이러니’ 현상을 초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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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국초기의 ‘불사이군’이라는 기본시책은 쇠퇴해서 ‘세조대’에 이르러, 왕위를 찬탈하는 정치적 난세를 맞아 무고한 선비들이 무참히 처형당하는 극한 상황이 전개됐었다.
당시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다 동지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본인은 물론, 가솔마저 연좌당해서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참다운 선비 성삼문은 황해도 ‘수양산’을 방문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절제와 도덕성을 잃고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극히 감동을 주고 있으니 이분이 곧 만고의 충신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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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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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바라보며 그곳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었다는
백이와 숙제를 한탄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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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캐서 먹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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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고사리가 별것 아닌 풀잎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자란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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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중종이 등극한 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람들은 훈구세력들의 훈공을 삭제 또는 소멸시키자는 주장이 고조되면서 양대세력의 정치적 쟁투는 시작되었다.
(훈구세력 : 국초의 개국공신 정종과 태종대의 정사공신, 세조대에 43명의 정란공신, 예종 대에 ‘남이’장군을 역모로 몰아 죽인 간신들, 그리고 중종대의 박원종 등 반정공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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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비(Classical scholar)정신
국어사전에 선비란 학덕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 또는 매우 어진사람이라 해석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사서삼경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 ‘선비’로서 존경의 대상이 됐던 개념이다. 현세의 선비란 동서양의 학식과 덕망 및 지조를 갖추고, 살신성인할 수 있는 인격자라야 된다.
학식을 갖췄으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현실 도피적 존재일 따름이다.
현세에서는 많은 지식인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직에 나서고 있지만, 도덕성이 결여된 경우가 허다하다.
공직자는 권력이나 재물을 탐내지 말 것이고, 아첨과 비굴한 모습을 금기시하며, 관직이 높을수록 겸손하고, 집안이 가난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돈이 많을수록 근검과 예의를 숭상하는 사람이 진정한 선비이리라!
조선왕조시대에 유림들은 이와 같은 ‘선비상’을 숭모해 왔으며, 존경받는 수많은 청백리가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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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왕조후기의 당쟁
역설적으로 조선시대에 당쟁이 있었기에 상호견제적인 정치를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정치학자도 있다. 조선시대의 당쟁동기와 그 결과가 정치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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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쟁의 시발
조선중엽의 당쟁은 보수적 훈구파와 정치개혁 세력인 사림파(조선초기에는 유학적 선비들을 사류 혹은 사족이라 칭했는데, 성종대의 학자 ‘김종직’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 학파를 의미한다)간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사림파가 화를 당한 사화사건은 곧 개혁세력에 대한 훈구파세력의 감정적 정치탄압이기도 했다.
그 정치적 사화는 주로 세조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그리고 인척 등의 세력이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의 정치계 장악을 저지시킨 정치적 탄압이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무오사화(연산군 代)와 갑자사화(연산군 代), 기묘사화(중종 代), 을사사화(명종 代) 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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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치탄압의 극복은 사림들의 성리학적 정치이념과 학통의 조직적 정치세력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난날 ‘훈구파’ 탄압에 저항했던 ‘사림파’가 집권하자 분열되기 시작했다.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 후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분열되는 것은 정치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림파’도 당초엔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되었으니 사림파의 그 분열 동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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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름 아닌 관리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조정랑 자리를 자기계파가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관료의 비리를 감찰, 탄핵하는 부서인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권마저 ‘이조정랑’이 갖고 있었는데, 이는 정승, 판서들의 ‘아집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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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조정랑’의 신변보장을 위해 후임 이조정랑의 추천권을 전임자에게 부여함으로써 대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나게 했던 것이다. ‘이조정랑’이 되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판서와 재상반열에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므로 명망 있는 젊은 선비들은 누구나 탐내는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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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정랑 직책 때문에 파쟁이 시작된 것은 1574년(선조7년)에 이조정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이임하면서 김효원(金孝元)을 후임자로 추천한 것이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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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은 병조좌랑 등을 거친 명망 있는 사대부로 평판이 높았으나 심의겸(沈義謙)이 적극 반대했다. 김효원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척신으로 권세를 누렸던 윤원형(尹元衡)의 식객이었다는 것이며, 문정왕후는 사림들을 박해했으므로 사대부들이 증오하고 있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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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이 다른 관직으로 옮길 당시 후임 대상은, 지난날 김효원을 반대했던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었기에 김효원이 적극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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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이조정랑’ 문제로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게 되자, 젊은 사대부들은 김효원을 지지했고, 노장사대부들은 심의겸 편을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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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명분보다 김효원의 정치적 ‘보스’격인 윤원형이 권세를 부릴 때, 젊은 사대부들은 피해를 당한 일이 없는 신진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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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인 건천동이기에 김효원 지지세력을 동인이라 했고, 심의겸의 집은 서울 서쪽인 정릉방에 있었으므로 서인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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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피할 수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해 8월 18일 병사해철군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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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은 ‘고니시 유키나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그냥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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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행록’은 명나라 장수인 진린이 왜군을 그냥 보내주자면서 “황제가 하사한 장검이 있다.”고 협박까지 했으나, 이순신은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거절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전날 밤 자정 하늘에 “이적을 제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도망가는 적을 향해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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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용감했지만 무모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은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고, 선미에 엎드려 있던 왜적들이 ‘이순신’을 향해 일제히 조총을 발사했다.”고 마치 표적을 자청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선조실록’은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하자 선조는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다.
선조는 전에도 ‘이순신’이 무군지죄(無君知罪)를 비롯해 네 가지 죄를 지었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율에 따라 죽어야 한다.(선조실록, 30년 3월 13일)’고 말한 인물이었다.
이순신의 자살설이 나온 이유는 종전이 가시화되면서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도 공격받기 때문이었다.
류성용은 전시에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천민도 양반이 될 수 있게’ 한 ‘면천법’, 양반도 군역의무를 지는 속오군, 부호가 세금을 더 많이 내게 하는 ‘작미법(후의 대동법)’ 등을 실시해 조선을 위기에서 건졌다.
종전이 기정사실화 되자 양반들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옛 조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류성룡 제거에 나섰다.
‘서애연보’는 류성룡 공격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실망해서, “시국 일이 한 결 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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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전사한 날 류성룡도 파직 당한다.
두 인재를 죽이고 조선은 다시 사대부의 천국으로 되돌아갔다.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인재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해 왔던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깊게 성찰할 때다.
지금 이런 어두움이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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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국이 이처럼 험악했기에 오늘날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이순신 제독의 죽음은 ‘타살적 자살’이었다고 현세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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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대목에서 네 차례의 처참한 ‘사화’를 통해 중앙 정계에서 퇴출되었던 사림들이 다시금 중앙 정계에 진출해서 국정의 실질적 담당자가 되어 경륜을 발휘하던 한편, 권력화 된 ‘사림집단’ 사이에 또 다른 붕당의 형태로 권력투쟁이 전개됐던 시기를 살았던 ‘율곡(1536~1584년)선생의 정치적 위업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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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사상(철학·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 등)은 다방면으로 건설적 영향을 미치게 한 ‘선각자’였다. 특히 율곡이 병조판서 시절(1583년 4월)에 국토방위를 위해 강군책을 주장했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세력’들이 적극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연유됐음인지, ‘율곡’선생은 당년 6월에 삼사의 탄핵을 받고 정계를 물러났다가, 같은 해 9월에 이조판서로 제수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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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듬해(1584년)에 지금의 인사동 자택에서 율곡선생은 타계했는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592년에 정예화 된 왜군 15만명이 침략해서 전국을 초토화시키고 물러갔다가, 5년 후(정유년)에 또 다시 침략당하는 국란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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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일은 임진년 ‘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왜국의 정세를 살피고자 통신사절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정사(正使)는 서인으로 황윤길이었고, 부사(副使)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
그런데 왜국에서 정사를 살피고 돌아온 위 두 사람의 보고내용이 정반대였다. 즉 서인 황윤길은 왜국이 조선을 침략할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부사인 동인 김성일은 왜국이 전쟁준비를 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반대적 주장을 펼쳐서,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들은 김성일의 보고만 믿고 전혀 무방비상태로 침략을 당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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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분오열의 분당
(동·서·남·북·노론·소론이 대표적)
서인 정철이 세자책봉문제로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하자, 정철을 처형하자는 과격파가 북인으로, 유배론의 온건파는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이어서 송시열 지지세력을 노론파로, 윤증의 지지세력은 소론으로 파생되어 조선말엽 외척세력의 세도정치가 출현되기 이전 약 300년간은 망국적 당쟁이 지속되어 국운이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와중에도 당쟁은 끊이질 않았다.
제17대 효종이 1659년에 붕어하자, 효종의 계모인 장열왕후의 복상기간을 1년으로 하자는 서인파 중의 노론파와, 3년을 주장하는 남인 ‘윤휴’의 주장이 출동하는 사건이 1659년 기해년에 발생했기에 이를 기해예송이라 일컫는다.
국가대사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복상기간 문제로 반대를 위한 반대의 파쟁으로 허송세월을 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복상사건’은 1차 예송이 있은 지 15년 후인 갑인년에 2차 예송으로 이어졌다.
현종(顯宗) 15년 2월에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가 타계하자 당시 생존해 있던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또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됐다.
2차 예송사건의 발단은 맏며느리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1년간 복을 입게 되어있고, 둘째 며느리가 죽으면 대복(9개월)을 입게 되어 있으니, 효종왕비를 맏며느리로 볼 것이냐 아니면 둘째 며느리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15년간의 예송논쟁이 재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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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들의 주장이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 처사라고 남인들이 공격하게 되었으니 이는 왕실 능멸 죄와도 관련되어져 서인 정권이 붕괴되고 남인들이 집권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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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유교국가라 해서 15년간 복상의 예송싸움으로 정권쟁탈을 획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의를 숭상하고 도덕성을 강조했던 유림들의 정치행태가 이와 같았으니 역사적으로 부끄럽고 민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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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언
역사적으로 겪어왔던 대표적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는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 사림들에 대한 기득권 집권세력들의 철저한 정치탄압이었다. 그리고 2차에 걸쳐 외침을 당해 국토의 황폐와 인명 및 재산의 막대한 피해를 보게 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정치적으로 변화되는 국제사회를 외면하고, 오로지 ‘유림’들 간의 이해득실이 걸린 ‘당파싸움’에만 몰입했던 악순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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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과연 성균관에서 공·맹의 도를 공부하고 벼슬길에 나아간 유림들의 정치적 행태라는 점에서 더욱 분노를 느끼게 한다.
현실사회에서 국정을 위임받은 지도층은 오로지 국민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낮은 자세가 절대적이다.
지도자가 백성을 위한다는 말은 다분히 국민을 내려다보는 고압적 의미가 담겨있다.
그들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녹봉을 받는 집권층이지만 오로지 백성을 위한 봉사자라는 옛 정치사상가의 ‘민본사상’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자기 돈이 아닌 국민이 낸 세금으로 분수에 넘치는 국민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고 선심적 ‘포플리즘’만을 외쳐대는 것은 국민적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조선왕조에 있었던 사화사건과 사색당쟁을 재삼 떠올리게 하는 정치병폐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 국민의 공복으로서 참다운 대의정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청사진이 이루어지기를 모든 국민은 고대하고 있음을 지도층은 재인식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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